기술을 알기에 더 잘 보이는 한계
챗GPT가 논문을 쓰고, 클로바노트가 회의록을 정리해 주는 시대입니다. AI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이제 속기사라는 직업도 사라지는 거 아니야?"라는 걱정(혹은 조롱) 섞인 질문입니다.

저 역시 개발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네이버 클로바나 구글의 음성 인식(STT: Speech-to-Text) API를 직접 다뤄보며 그 놀라운 발전 속도에 감탄하곤 합니다. 조용한 환경에서 한 사람이 또박또박 말하는 내용은 이제 90% 이상의 정확도로 받아쓰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기술을 깊이 알면 알수록, 저는 현장에서 인간 속기사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AI가 아직 넘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넘지 못할 '결정적인 벽'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1. 기계는 '맥락(Context)'을 읽지 못합니다 가장 큰 차이는 '문맥 파악 능력'입니다. 인간의 대화는 단순히 단어의 나열이 아닙니다. 같은 단어라도 앞뒤 상황, 말하는 사람의 의도, 미묘한 뉘앙스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예를 들어, 격렬한 토론 중에 한 참석자가 비꼬는 투로 "아~ 예, 참 잘~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AI는 이 음성을 문자 그대로 긍정적인 칭찬으로 인식하여 기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인간 속기사는 그 발언의 반어적 뉘앙스와 냉소적인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회의록에 '(반어적으로)', '(장내 소란)' 같은 지문을 덧붙여 발언의 진짜 의도가 왜곡되지 않도록 기록합니다. 이러한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아직 인공지능이 범접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입니다.
2. '아수라장' 속에서 빛을 발하는 전문가의 귀 AI 음성 인식은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발음과 조용한 환경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실제 속기 현장은 어떤가요? 주주총회장은 고성이 오가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마이크를 잡고 소리치며(다중 화자), 심한 사투리나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AI의 인식률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하지 못해 대화 내용이 뒤죽박죽 섞이거나, 소음을 사람 목소리로 착각해 엉뚱한 외계어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반면 숙련된 속기사는 수년간 단련된 '전문가의 귀'로 소음 속에서 유의미한 목소리만 걸러내고,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정확히 식별하여 누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완벽하게 분리해 기록합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경험과 직관의 영역입니다.
3. 법적 책임과 보안의 문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책임'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이사회 회의록이나 법정에 제출할 녹취록을 AI에게만 맡길 수 있을까요? AI가 오타를 내거나 내용을 잘못 기록해서 막대한 금전적 손해나 법적 책임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기록은 곧 책임입니다. 국가공인 속기사는 자신이 작성한 기록물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집니다. 도장을 찍는 순간, 그 내용의 정확성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업의 일급비밀이 오가는 회의 내용을 클라우드 기반의 AI 서버에 올리는 것은 심각한 보안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철저한 비밀 유지 서약을 하고 오프라인에서 작업하는 속기사야말로 보안이 생명인 기업과 기관이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입니다.

물론 속기사들도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초안 작성 같은 단순 반복 업무는 AI에게 맡기고, 인간은 더 고차원적인 검수와 맥락 파악에 집중하는 협업 모델이 미래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지만 '기록'이라는 행위의 본질이 '소통과 이해'에 있는 한, 현장의 공기까지 읽어내는 인간 속기사의 가치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술은 발전하지만, 그 기술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따뜻한 이해력과 책임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도 AI가 놓친 1%의 디테일을 찾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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